안진국  Jinguk, An
2022. 미술비평

  

그리움과 아련함의 양감

 
 “남은 것들만 남은 자리 그 옛날 거기에 하나의 잔해가 있어 검은 어둠 속에서 때때로 빛을 발했다.”
– 사뮈엘 베케트
 
아주 많은 경우 우리는 사소한 자연현상에도 마음이 흔들린다. 바람이, 비가, 검은 구름이, 함박눈이 마음을 흔든다.
김민지는 말한다. “어김없이 비가 오면 고향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작업노트) 고향은 남은 것들만 남은 자리. 대부분의 사람에게 고향은 자기가 살던 때의 시간으로 남아 있는 자리다. 하지만 고향이라는 시공간은 때때로 빛을 발한다. 비가 오면 작가의 마음속 고향은 밝아진다.
 김민지의 작업을 보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릴케가 나무와 연관된 시를 여러 편 남겼고 나무를 매개로 정체성을 굳건히 했기 때문이다. 그 역시 글감을 얻기 위해 일평생 일정한 거처 없이 유목민적인 삶을 살기도 했다. 김민지 또한 나무를 그만의 예술적 화두를 삼고 다각도로 연구하고 있다. 특히 〈앉은 나무〉(2022)의 나무는 자신의 정체성을 투사한 것을 넘어 적극적인 의인화를 통해 물아일체의 경지로 나아간다. 두 개의 긴 캔버스가 바닥 면까지 설치되어 2차원의 평면에 자리한 나무는 3차원의 양감을 지닌 나무가 된다. 그 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바닥에 앉아 지친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라는 착각이 든다. 김민지가 연구하는 나무들은 주로 교통수단으로 이동하며 바라보는 나무들이다. 정착을 원한다고 하지만 더욱더 욕망하는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그는 계속 이동해야만 한다. 춘천-서울-공주 770km를 이동하며 보는 풍경들은 오늘도 그를 사로잡는다.
 

실존과 비실존의 중첩

  
타지의 삶은 찢어진 이불을 덮고 자는 것과 같다. 어디로든 빠른 시간에 이동이 가능한 시대에 노마디즘(nomadism)이 시대정신처럼 회자되지만, 유동하는 삶에서 마음의 허기와 추위를 피하기 힘들다. 김민지 작가는 고향을 떠나온 지 10년이 되었다. 그는 이번에 <열 번째 나무>(2020)를 그렸다.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그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래서 <열 번째 나무>는 상징적이다. 작가의 현재 모습(열 번째)과 이상(나무)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무는 부동하고 싶은 작가의 환유적인 대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열 번째 옮겨진 나무로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현재’와 ‘이상’과 같은 상이한 상황의 결합은 <비 오는 139km의 풍경> 연작에서도 잠재적으로 스며 있다. 이 연작은 내재적으로 ‘현재’의 표상인 서울—지금은 대구에 있다—과 ‘이상향’인 작가의 고향 인제가 결합되어 있고, 외재적으로 ‘부동하는’ 풍경과 ‘흘러내리는’ 빗방울, 더불어 그 풍경이 형성되는 공간인 ‘움직이는’ 버스가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상이한 상황의 결합이 자아내는 것은 일종의 결여된 것의 양감이며, 그 질감은 ‘낯섦’이다. “비가 내리면 버스 창밖을 보면서 바깥 풍경을 관찰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자연들이 낯설게 다가왔다.”(작업노트) 이 ‘낯섦’의 공간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낯설 수밖에 없는 것은 눈앞의 자연 풍경이 현재의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공간(작가의 기억 속 고향)과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향이 ‘고향’일 수 있는 것은 떠나올 때 상태로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현실 공간에는 진정한 의미의 ‘고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의 공간으로서 고향에 대한 감정을 더 고양시키는 것은 수묵 화법이다. 김민지의 수묵화는 모든 색채가 함축된 먹(墨)이 농담에 따라 미묘한 무채색의 다양한 톤을 형성하면서 무의식에 침전된 기억의 조각을 어렴풋하게 보고 있는 듯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결국 작가가 그리는 풍경은 실존(현실 공간)과 비(非)실존(기억, 고향)이 중첩된 곳으로, 보이지만 접근할 수 없는, 존재하지만 선명하지 않은 장소로 등장한다. 

유리창: 보이지만 닿을 수 없는

 
김민지의 작업이 그리움과 아련함이 느껴지는 것은 눈에 보이는 그곳에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방울은 슬픔의 환유로서 ‘눈물’을 상기시켜 쓸쓸한 분위기를 불러온다. 하지만 작가의 그리움과 아련함은 단순히 이러한 분위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다. 근원적으로 물방울이 암시하는 것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물방울의 맺힘을 통해서 우리는 그곳에 유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방울이 유리창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이다. 유리창은 ‘해방’과 ‘억압’의 이중적 기능을 수행한다. ‘해방’으로서 유리창은 답답한 내부를 광활한 외부와 소통시킨다. 반면, ‘억압’으로서 유리창은 비와 눈, 바람, 침입자 등 외부의 위협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투명한 벽이다. 결국 유리창은 제한된 자유와 강력한 격리를 드러내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대상을 소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대상이 보이지 않을 때보다 보일 때 간절함은 더욱 커진다. ‘유리창’ 너머로 외부 대상을 바라보는 내부의 존재는 ‘바라보는 대상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 강렬한 그리움과 아련함에 사로잡힌다. 결국 김민지의 작업에서 물방울의 맺힘은 내부의 존재(작가, 감상자)가 결코 외부의 대상에게 갈 수 없음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우리가 고향을 떠올릴 때 아련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다시는 그곳(기억의 공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리는 풍경은 가닿을 수 없는 기억(고향)이 중첩된 공간으로, 꿈결처럼 흐릿하다. 반면, 창에 맺힌 물방울들은 또렷한 실체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선명한 물방울은 현실을, 흐릿한 풍경은 이상향(기억, 고향)을 드러내는 기제처럼 보인다. 현실이 선명하면 선명할수록 이상향은 더욱 잘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 김민지는 ‘나무’에 대한 사유를 깊게 하고 있다. <열번째 나무>도 이러한 맥락에서 창작된 작업이며, <작은 숲>(2020)과 <조각난 풍경> 연작(2020), 최근의 <비 오는 139km의 풍경> 연작도 같은 맥락이다. 더불어 물방울을 줄이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작업을 실험하고 있는데, 근작의 몇몇 작업에서는 물방울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나,무>(2020)가 주목되는데, 동일한 이미지에 하나는 물방울을 그리고, 다른 작업은 물방울을 없앤 두 작품을 병치해서 보여줬다. 작가에 의하면 이 제목이 나무를 ‘나’로, 물방울이 없음을 ‘무’로 의미하다고 한다.
물방울의 맺힘이 사라진 김민지의 작업은 어떨까? 아련함의 양감이 더 커질까, 아니면 아예 사라져 버릴까? 나무에 관한 사유는 어디까지 이를까? 실험은 어디를 향해갈까? 김민지의 실험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 실험을 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다.